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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이 / 2004-07-09 / 오후 3:35:46 / 203.255.3.190
조회수 : 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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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퍼온글] [파리의 연인] 기주의 눈빛은..밤보다 어두웠다. |
(태영을 보내는 기주의 마음..펌)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선 승준은 사장실을 내리누르고 있는 무거운 공기에 짧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들어오는 문소리조차 못들은 건지 아님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힘겨운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자신의 명패만 바라보고 있는 기주의 눈빛은 밤보다 어두웠다.
'이렇게 전해주세요. 참 고마웠다구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숨은 서운함을 놓칠 승준이 아니었다.
'이렇게 쫓아내는데 뭐가 고마워요.'
진심이었다. 기주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는 승준으로서는 그를 한편으로 이해하면서도 그가 기꺼이 짊어진 짐들이 못내 못마땅했다.
지난 10여년을 옆에서 지켜본 결과, 그는 너무나도 충실히 자신의 일들을 해내고 있었다. 때로는 한회장이라는 폭군이 얼른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기주는 아들로서, 한사람의 기업가로서 보기드물게 자신의 몫을 단단히 해내는 인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태영이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단단한 벽에 균열이 생기듯 빈틈을 보여주던 기주의 모습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따금씩 알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머무는 이유를 승준은 태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이젠 끝이었다.
"이런 형한테 뭐가 그렇게 고맙단 거였을까."
승준은 차라리 기주에게 그런 변화가 없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한번 멀어진 그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받아야 할 수많은 고통을 알리 없었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그제서야 기주의 눈이 승준을 향했다.
"강태영씨가 그렇게 전해달래요.
참 고마웠다고. 너무 많은 일들을 도와줘서."
얼른 시선을 거두며 의자에 등을 기대는 기주의 이마에 가는 주름이 생겼다.
"하나 물어봐도 돼요?"
".....?"
"강태영씨를 옆에 뒀던 이유, 그리고 강태영씨를 밀어내는 이유."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나..... 숙제 아직 다 못했다."
기주는 느릿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지난번에 나한테 물어봤었지? 왜 강태영을 도와주냐고.
아무리 신세를 졌다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그가 투명한 창으로 따갑게 쏟아지는 햇볕으로 다가갔다.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기주는 말을 끊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건조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덧 붙였다.
"아마.... 같은 이유겠지."
그의 눈빛이 한없이 어두운 나락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승준은 할 수 있다면 얼른 손을 뻗어 기주의 뒷덜미라도 채서 그 어둠에서 끌어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띠리리리.'
정적을 깨는 휴대폰 소리에 기주는 예의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응. 무슨 일이야?"
- 점심 같이 하자구. 할 얘기도 있구. 이쪽으로 올래? 같이 움직이게
승경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기주의 얼굴은 다시 단단한 냉정함이 서렸다.
"그래. 좀있다 보자."
.
.
.
.
자신을 향해 백 명이 다가와도 그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어떤 능력보다도 놀라운 것이었으며 그자신 조차도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의 시야의 한구석에 있던 그녀가 세상의 모든 것을 밀어내듯 등장하는 것은 그 어떤 놀라운 무대장치보다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들판을 폴짝폴짝 뛰듯 경쾌한 걸음걸이에 리듬을 타듯 나풀대는 머리카락,
그리고 주변의 어둠까지도 다 숨어버리게 만드는 밝은 미소...
극장에서 일한다던 태영의 친한 동생과 작별을 하는 순간까지 그녀는 예의 강태영이었다.
하지만 손을 흔들어 이별을 고하고 돌아선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태영의 얼굴에 드리운 어둠은 자신 때문이었다.
기주는 차에서 당장이라도 뛰어내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녀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그녀의 생기 잃은 발걸음은 결국 그를 멈춰서게 했다. 기주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고 자신의 시선을 그녀에게 맞추며
'정신차려!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떻게 살아갈래?' 라고 소리라도 버럭지르고 싶었다.
차라리 그녀가 사장실로 쳐들어와서 대판 싸움이라도 벌렸다면 그녀를 보내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늘 아침 로비에서 마주쳤을 때 자신의 뺨을 한 대 후려 갈겼다면, 보내는 마음이 가벼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눈물 담긴 눈망울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잖아도 동그랗고 좁은 어깨가 사람들 사이에 서있으니 더 축 늘어지는 것처럼 보여 얼른자신의 손으로 두드려 주고 싶었다. 서울에 와서 얼마되지 않아 우연히 대학로에 친구들과 함께 있던 그녀를 발견했을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안아줄 수 있다면, 그래서 태영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다면...
하지만 너무 많은 일들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
순간 태영의 모습을 놓친 기주는 자신도 모르게 차에서 튀어나와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태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미궁에 갇힌 아이를 구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금새 어디서라도 그녀의 울먹이는 비명소리가 들릴 것처럼 불안하기만 했다.
"아야! 아... 죄송합니다."
낯익은 목소리.. 누군가와 부딪힌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태영이 서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픈지 이마를 손바닥으로 비비면서도 상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대학시절 M.T. 때문에 탔던 기억이 있는 지하철.
자신의 고급스런 옷차림과 괴리되어 보이는 지하철 안의 풍경..
하지만 그녀가 서있는 자리는 아귀가 딱 맞는 퍼즐처럼 자연스럽게 보였다. 여전히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태영은 자신의 앞에 자리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여러차례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 있었다.
얼른 그녀의 작은 두발이 쉴수 있도록 확 끌어다 앉히고 싶었지만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사람들 사이에 그녀를 바라보는 기분은 생각보다 비참했다.
다가갈 수도 말을 걸 수도 없다...
'네가 옆에 있는 게 싫어졌다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다.
그녀에게 남겼던 상처가 똑같이 자신에게도 남은 건 한기주의 계산착오였다.
"어? 어... 어휴...!'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당황한 소리.
정거장을 놓친 모양이었다. 기주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너무나 강태영 답다.
그리고 곧이어 씁쓸해졌다.
그녀는 그가 없어도 누군가와 부딪히고 미안해하고
무언가 잃어버리고 당황해 하며
정거장을 놓치고 난처해 할테지만, 기주는 옆에 없을 것이었다.
태영은 다시 돌아가지 않고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어딘가로 향했다. 그녀를 따라 걷는 내내 기주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스스로 물어봤다. 승준이 자신에게 내린 숙제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졌다.
분명한 건 강태영을 발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은 철저히 '한기주'의 패턴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10대일 때 조차 누군가를 무작정 쫓아가고 이렇게 철저하게 숨어서 지켜보는 일 따위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20여분쯤 비탈길을 걷자 작은 공원하나가 나왔다. 태영이 사는 동네와 가까운 곳에 있는 그 공원은 제법 높은 지대에 있어 한눈에 서울 시내가 보였다. 그녀는 피곤한지 쓰러지듯 돌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풀이 죽어보이는 그녀의 살짝 굽은 등.
기주는 따뜻한 온기를 담아 그녀의 등을 곧게 쓸어주고 싶었다.
- 드르르륵
자신의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 승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로 주머니에 넣고 태영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녀와 이렇게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우선이었다.
정확히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좋았다.
지금은... 어떤 것에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우연은 이번 한번 뿐일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태영은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내 무언가 재잘대고 있었다.
표정을 다잡으며 자신에게서 그늘을 지워버리려는 그녀.
그리고 늘 갖고 다니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도 꺼냈다.
아마도 자신의 모습을 찍는 모양이었다.
- 찰칵
윙-하는 소리를 내며 인화지를 뱉어내는 사진기를 바라보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의 태영을 뒤로하고 기주는 돌아섰다.
"간다."...
마치 누구에겐가 작별인사를 하듯 짧게 소리낸 그는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그의 그림자 뒤로 태영이 다급히 두리번 거리며 그를 찾는 것도 알지 못한 체...
그런 태영의 눈빛이 어떤 간절함을 지녔는지 보지도 못한 체 그저 멀어지려고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지독한 바램이었을 뿐이었다....
** 다음까페.. 아자!한기주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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